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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이 마을을 집어삼킨 날: 영국 인클로저 운동이 근대 세계를 만든 방식

15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은 공동으로 사용하던 토지를 사유지로 변경하는 혁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기초를 만든 농업혁명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살펴봅니다.

추익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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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이 마을을 집어삼킨 날: 영국 인클로저 운동이 근대 세계를 만든 방식

울타리로 둘러싼 변혁의 시작

18세기 초 영국 시골. 토마스 모어가 표현했듯이 "양이 사람들마저 잡아먹고 삼켜버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을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중세부터 이어진 '개방경지제'라는 시스템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울타리로 둘러싼 사유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 역사의 무대에 올라온 순간이었습니다.

영국의 농업 혁명은 15·16세기의 제1차 농업혁명과 18·19세기의 제2차 농업혁명으로 나뉘었으며, 이러한 농업혁명은 토지소유 관계의 변혁을 통하여 농촌의 제계층 및 사회경제적 구조의 급격한 변동을 가져와서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하고, 세계에 앞선 산업자본주의를 확립할 전제를 준비했습니다.

중세를 지배해온 개방경지제는 마을과 농부들의 삶 방식이었습니다. 개방경지제는 장원이나 마을을 중심으로 수백 에이커에 달하는 큰 밭 두세 곳이 펼쳐져 있고 이 밭들을 띠모양으로 분할하여 대상재배 방식으로 경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공동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고, 공동의 규칙에 따라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체계는 혁신과 효율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 앞에서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술과 욕망이 만난 지점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 새로운 농업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16세기에 유럽에 도입된 농법으로는 파종법이 있었고, 이는 농작물 종자를 땅 깊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1500년대까지도 유럽에서는 종자를 심을 때 흙 속에 심지 않고 그냥 걸어다니면서 흙 위에 뿌렸기 때문입니다.

더 효율적인 기술이 도입되면서 야심 있는 지주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양모라는 '검은 황금'입니다. 제1차 인클로저에 있어서는 양이 사람들마저 잡아먹고 삼켜버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모공업의 급속한 번창과 양모 가격의 등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양모의 가격이 올라가자, 지주들은 합리적 계산을 시작합니다. 밀을 재배하는 것보다 양을 키우는 것이 훨씬 수익성이 높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경계를 긋다, 제도를 바꾸다

인클로저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계'를 긋는 행위였습니다. 인클로저란 종래 황무지, 입회지 혹은 개방 경지의 제지조를 생울타리 기타 경계표지로 둘러서 공동권을 배제하여 사유지임을 명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우리 마을의 땅'이었던 것이 이제는 '나의 땅'이 됩니다. 공동으로 사용하던 황무지도, 목초지도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입니다.

개방경지제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의 경작, 수확, 건축 규범을 따라야 했으며, 지배적인 개방경지제의 비효율성은 자원 배분을 최적화하지 못하게 하는 공동체적 토지 관리와 농민들이 경작해야 할 작고 흩어진 토지 조각을 가지고 있어 한 조각에서 다른 조각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효율성의 빛과 불의 그림자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을 변모시켰습니다. 18세기에 노포크 주에서 타운젠트라는 사람이 '노포크 농법(혹은 타운젠트 농법)'을 창시하여 생산의 증대에 기여했으며, 이것은 일종의 윤작법으로 봄에 소맥의 재배로 시작하여 근채의 일종인 순무와 대맥 그리고 클로버를 차례로 재배하는 기술이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농업 생산성이 폭증했고, 이 경작법은 휴경지를 없애 식량 생산량을 확 늘여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 변화의 수혜자는 아니었습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잉글랜드 교회와 정부는 인클로즈 관행을 비난하였고 법률로서 규제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반발도 소작농을 땅에 붙들어 둘 수 없었고 많은 농민이 길 위를 떠도는 유랑의 유행이 발생하였습니다.

도시를 세우고 산업을 일으킨 이주

토지를 잃은 농민들의 행렬은 시작되었고, 이들의 이동이 역설적이게도 현대를 만듭니다.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함에 따라 공업 노동력의 공급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산업 혁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공장은 노동자가 필요했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갑니다. 이것이 바로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대규모 노동력의 이동입니다.

더 나아가,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처럼 인클로저 운동도 정보의 흐름과 아이디어의 확산을 가속화시켰습니다. 농촌의 안정적 공동체가 흔들리면서 개인의 선택과 경제적 행위가 중심으로 부상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의 발아입니다.

근대의 출발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인클로저의 결과 농업 경영 방식은 토지와 돈을 가진 지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농업에 있어서의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고, 공업에서 자본가, 경영자 그리고 노동자로 삼분되는 것처럼 농업에서도 지주, 차지농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삼분법이 나타났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효율성과 경제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성공한 혁신입니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산업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해체와 농민의 대규모 이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전통적 삶의 방식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이 선택의 결과 속에 살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공동체가 희생되는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안정성을 포기할 것인가? 400년 전 영국 시골에서 시작된 인클로저 운동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우리가 계속해서 마주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기자 추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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