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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역사상 유일한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40년 통치

1717년 출생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습니다.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 전쟁 속에서도 오스트리아를 강대국으로 만든 그녀의 삶과 업적을 들여다봅니다.

김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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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지위는 불가능했지만, 왕국의 운명은 그녀의 손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위대한 통치

오스트리아 여행을 준비할 때 호프부르크 왕궁이나 쇤브룬 궁전을 예약하게 되면, 역사 안내문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이며, 그녀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습니다. 단순히 '왕비'가 아니라 '통치자'라는 이 단어 하나가 18세기 유럽에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말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내 이상의 상황에서 한 나라를 떠맡은 군주의 사례를 찾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의 백성과 신의 보호 속에서 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다."—마리아 테레지아

예상치 못한 왕좌: 23세에 제국을 떠맡다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여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프란츠 1세는 정치에 큰 뜻이 없어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운영하며 실권을 가졌습니다.

23세의 여성이 갑작스럽게 거대한 제국의 실질적 운영자가 된 것입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이는 마치 오늘날 우주 탐사선에 여성 우주인이 처음 착륙하는 것처럼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전쟁으로 시작된 통치, 개혁으로 굳혀진 통치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을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야말로 '여자가 왕이라고?'라는 의심과 함께 시작된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기대 이하의 상황을 기대 이상으로 뒤바꿨습니다. 그녀는 사병 확충 주장을 물리치고 다른 나라보다 먼저 전국에 초등학교를 신설하여 의무 교육을 확립시켰으며, 같은 내용의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배포되어 각 지역마다 각각의 언어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하지 않던 의무교육 제도! 쇤브룬 궁전의 정원을 걸으며 "왜 이 궁전이 그렇게 유명한가?"라고 물어본다면, 바로 이 여성의 통찰력과 혁신 때문입니다. 쇤브룬 궁전의 역사를 살펴볼 때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이해하면 여행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형식은 남편, 실질은 아내: 권력의 미학

명목상의 황제인 남편 프란츠 1세의 치세기간 중 그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 관여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첫사랑인 프란츠 슈테판과 당시로서는 극히 드물었던 연애 결혼에 성공하였으며, 금실이 좋아 부부 생활은 매우 원만했다는 것입니다.

정략결혼이 당연하던 시대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후 함께 16명의 자녀를 낳으며 가정을 다스렸고, 동시에 광대한 제국을 운영한 그녀. 이것이 여성 리더십의 또 다른 면이 아닐까요?

개혁의 여왕이 만든 현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군주였으며,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단일화를 구축했습니다.

또한 매춘을 금지시키고, 매춘 여성과 포주, 중개인들을 잡아다가 채찍형을 가한 후 노동 교화소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이 정책들을 모두 긍정하기는 어렵지만, 18세기 여성 통치자가 '도덕성'과 '교육'을 국정의 중심에 놓았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여행 팁: 마리아 테레지아의 발자국을 따라 빈을 걷다

빈을 여행할 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를 이해하면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 호프부르크 왕궁: 그녀가 실제 거처하던 공간들, 특히 국정 회의실과 개인 서재
  • 쇤브룬 궁전: 여름 별궁으로 사용된 이곳에서 그녀의 일상과 가족 생활이 어떠했는지 추적
  • 빈 국립도서관: 그녀가 후원한 문화와 교육의 흔적
  • 슈테판 대성당: 종교적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의 기도 장소

평가가 갈리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았던 군주였습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통치의 황혼

1765년 갑작스러운 프란츠 1세의 사망으로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고,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 왕과 요제프 2세 황제의 독특한 공동 통치가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인 어머니와 급진적인 아들 사이의 충돌, 그것도 제국의 운명이 걸린 충돌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전쟁 속에서도 학교를 지었고, 도덕적 기준을 지키면서도 현실주의적 외교를 펼쳤으며,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후에도 40년간의 통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빈의 거리를 거닐 때, 매 모서리에서 그녀의 영향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단순히 관광객이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여행자가 될 것입니다.

김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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