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꺼져도 보상이 남지 않던 시대는 끝, 공적보험이 재난의 벽을 무너뜨린다
국민권익위가 땅꺼짐 사고 보상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던 사고에서 피해자들이 이제 신속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땅이 꺼져도 보상이 남지 않던 시대는 끝, 공적보험이 재난의 벽을 무너뜨린다
4월 23일, 국민권익위원회가 한 장의 권고안을 들고 나타났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전국 243개 지방정부 실태조사와 의견수렴을 거쳐 '지반침하 사망자 배상 및 보험 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해 광역지방정부와 한국지방재정공제회에 권고했다.
평소 같으면 흘려 넘길 수 있는 공식 발표다. 하지만 이번 개선안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다르다. 우리가 실제로 걷는 땅, 그 위에서 벌어지는 재난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침내 가동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상 위의 불안, 숫자로 드러나다
실태조사의 수치들은 냉정했다. 전국 하수도관의 40% 이상이 매설된 지 30년을 넘는 등 노후화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땅꺼짐 사고도 연평균 150여건이 발생하며 피해 규모가 대형화하고 있는 추세였다.
해마다 150건 정도씩 발생하는 땅꺼짐 사고. 대부분의 국민은 이 숫자가 자신의 발을 디딘 도시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 도로가 내려앉을지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감도 이성적이기보다는 막연하다.
보상 시스템의 깊은 구멍
여기가 핵심이다. 땅이 꺼져서 인명 피해가 발생해도 보상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 이는 단순한 행정 미흡이 아니라 재난 피해자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던 구조적 문제였다.
땅꺼짐 사고는 도로나 지반이 갑자기 꺼져 차량이나 보행자가 피해를 입는 사고를 말하는데,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민사 소송이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누가 책임인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으니 법정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몇 해가 흐르고, 유가족은 그사이 애도할 여유도 없이 소송 서류를 챙긴다. 이것이 현행 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행 공적보험이 대규모 피해 상황에서 제역할을 못 했다는 것. 각 지방정부가 가입한 현행 시민안전보험 약관에 '땅꺼짐' 등 보장항목이 없는 경우 보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고, 영조물배상보험의 경우도 지방정부가 특약으로 설정한 한도액 범위 내에서 대인·대물 구분 없이 보상금이 분할 지급돼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1인당 보상액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피해자가 많을수록 보상액이 작아진다는 모순. 이제 그 벽이 무너지려 한다.
변화의 신호, 서울에서 시작되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개선안이 어디서 시작됐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 제도개선은 서울특별시 시민감사옴부즈만위원회가 대형 싱크홀 사고 시 공적보험 보장 체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국민권익위에 개선 필요 사항으로 제안함에 따라, 중앙-지방정부 간 협업으로 추진되었다.
서울 시민감사옴부즈만위원회가 움직였다. 현장의 목소리가 중앙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국민권익위가 귀 기울였다. 이것이 변화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개선안의 내용, 현실이 되기까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지나?
권익위는 광역지방정부가 가입한 시민안전보험에 '땅꺼짐으로 인한 사망 보장항목'을 추가로 신설하도록 권고했다. 그리고 영조물배상보험과 관련해 한국지방재정공제회에 땅꺼짐으로 인한 사망 피해 보상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특약을 마련하거나 현행 도로담보 특약상의 보상한도액을 상향하고 대인·대물 보상을 분리하도록 개선해 사망 피해 유가족에 대한 보상 수준을 강화하라고 했다.
두 개의 보험이 동시에 강화되는 것이다. 시민안전보험에는 새로운 보장항목이 생기고, 영조물배상보험은 보상 한도를 높이고 피해자별 보상을 분리한다. 결과적으로 사망자가 많을수록 한 명당 받는 보상액이 늘어나는 구조로 바뀐다.
길고 험한 길, 이제 시작이다
그러나 이 결정이 즉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 시행 시기는 2026년을 목표로 준비 중이며, 관련 법령 개정과 예산 확보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정책은 발표되었지만, 법령 개정이 필요하고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자체와 협의체를 구성해 세부 실행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문제는 확인했고, 방향도 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결정을 실제 현실로 옮기는 행정의 의지와 속도다.
재난 피해자 보호의 새로운 장을 향하여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는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서울의 한 옴부즈만위원회가 들은 피해자들의 호소. 그것이 국민권익위의 실태조사로 이어지고, 전국 243개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한 조사로 확대됐다. 데이터가 모이고 분석되면서 개선안이 나왔다.
이로써 땅꺼짐 사고 피해자들이 장기 소송 없이도 신속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공적보험 강화는 재난 피해자 보호의 중요한 전환점"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직 여정은 계속된다. 법령 개정이 필요하고, 세부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해자들이 책임 소재를 묻지 못해 길어지는 소송에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이 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여전하겠지만, 그로 인한 피해에 국가가 최소한의 보장을 제공한다는 약속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이것은 큰 변화의 신호다. 도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하나 더 생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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