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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강제한 선택—에어컨을 둘러싼 유럽 정치권의 딜레마

유럽을 강타한 기록적 폭염이 에어컨을 정치 논쟁의 중심에 세웠다. 생명을 살리는 냉방과 지구를 보호하는 기후 대응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현장을 통해 살펴본다.

추익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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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강제한 선택—에어컨을 둘러싼 유럽 정치권의 딜레마

폭염이 부른 불편한 진실

프랑스 파리는 40.3도, 남부 피소스는 44.3도까지 치솟았고 밤 기온도 떨어지지 않아 1947년 이래 가장 더운 날로 기록됐다. 스페인에서는 200명이 넘는 폭염 관련 사망이 보고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도 고령층과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인명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날씨 문제가 아니다. 유럽 전역을 강타한 기록적 폭염이 시민들의 일상과 기후 대응에 대한 인식을 흔들고 있으며, 기존에 자리 잡아 온 환경주의 기조와 에어컨 사용 규제를 둘러싼 논쟁도 빠르게 확산되는 양상이다. 유럽이 무려 20년을 두고 고민해온 문제가 폭염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것이다.

유럽의 저항—왜 에어컨을 외면했나

업계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은 역사적 맥락을 갖는다. 애초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전통적으로 여름이 짧고 비교적 서늘했고, 기온이 잠시 오르더라도 30도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으며 습도 역시 동아시아처럼 높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적 거부감이다.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에어컨을 미국이나 아시아식의 과도한 소비문화와 연결해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으며, 에너지 낭비와 탄소 배출을 늘려 환경에 부담을 준다는 비판과 함께 자연 환기에 의존하며 여름을 보내는 것이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유럽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자부심도 존재했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유럽의 에어컨 보급률은 20%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프랑스의 주택 에어컨 보급률은 지난해 기준 24% 수준이며, 에어컨이 설치된 학교는 14%이고 대중교통은 7%다.

현실의 벽

문제는 기존 인프라가 폭염을 상정하지 않은 채 설계됐다는 점이다. 유럽은 에어컨이 대중화되기 이전에 건축된 노후 건물이 많아 중앙 냉방 시스템을 새로 설치하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며, 특히 영국 등 북유럽 지역의 주택은 애초 여름철 폭염을 고려하지 않고 건축됐고 실제로 영국의 주택 6채 가운데 1채는 1900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인프라 문제를 넘어서도 규제의 벽이 높다. 문화재 보호구역이나 등록 문화재 건물은 실외기 설치가 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허가가 거부되는 사례가 많다. 이는 유럽 도시의 역사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폭염 속 시민의 생명을 외면하는 선택이 되고 말았다.

정치의 장으로 옮겨진 논쟁

현재를 살리는 쪽 vs. 미래를 지키는 쪽

내년 4월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 쪽은 심각한 폭염에 대처해 에어컨을 '풀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은 '그러다가 폭염의 근본 원인인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폭염을 더 심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극우 진영의 마린 르펜은 TV에 출연해 "에어컨이 생명을 구한다"면서 프랑스 대부분 학교와 병원에서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으며, 대통령에 선출된다면 전국에 에어컨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맞서 환경 진영은 신중함을 촉구한다. 녹색당 대표 마린 톤들리어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학교와 병원에서 에어컨 설치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녹색당은 "진짜 문제는 단열이 제대로 안되는 것"이라며 "건물의 에너지 효율 제고에 투자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할 수 없는 역설

문제의 본질은 역설 자체다. 에어컨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전력 소비가 증가하고 온실가스 배출도 늘어나며, 그 결과 기후변화가 더욱 심화돼 미래의 폭염은 더욱 강해진다.

현재의 인식 변화는 빠르다. 유럽에서 전례 없는 폭염으로 사상자가 잇따르자 에어컨이 '필수재'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이 설치비용을 삼삼오오 마련하고 급진적인 환경 보호 정당도 병원 등 필수시설에는 설치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업계도 반응했다. 유럽의 주요 에어컨 제조사 중 하나인 다이킨은 2010년 이후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구매가 2배로 늘었다고 밝혔으며, 히타치는 프랑스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이 2035년 50%까지 늘어날 것으로 관측했다.

유럽이 묻는 질문, 인류에게 닥친 과제

기후변화가 심화할수록 각국은 프랑스와 같은 질문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탄소를 줄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더위를 버티기 위한 적응에 한정된 자원과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유럽의 에어컨 논쟁은 단순히 한 대륙의 정책 논쟁이 아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적응'과 '감축'이라는 두 과제가 어떻게 충돌하고 타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당장의 생명과 먼 미래를 저울질하는 유럽의 선택이 세계가 배워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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