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왕궁에서 펼쳐진 비극: 프란츠 요제프와 시시, 제국보다 사랑을 택한 두 영혼
18세에 황제가 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16세 소녀 엘리자베트의 첫눈에 반한 사랑. 그러나 합스부르크 황실의 엄격한 예법과 가족의 간섭 속에서 두 사람의 결혼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부부에게 배운 권력과 사랑의 비극.
황제의 첫눈: 황실 예절과 첫사랑이 부딪히는 순간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불과 18세였다. 청년 황제는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엄격한 교육으로 준비된 정치가였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소년이 남아 있었다.
1854년 이종사촌 누이인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
황제가 본 여인은 누구인가? 1837년 출생한 엘리자베트(일명 시시)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딸이며, 1854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출가해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19세기에 손꼽히는 미녀였으며, 별명이 씨씨였던 엘리자베트는 머리숱이 많고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길렀으며, 머리를 다듬는데만 3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1854년 4월 24일 둘은 결혼했을 때 황제의 나이는 24살, 황후의 나이는 16세였다. 어린 신부가 들어간 곳은 유럽 최고 명문가의 궁정이었다.
황실의 감옥: 자유를 잃은 미녀 황후
황제의 사랑은 진실했다. 황제는 엘리자베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황실의 현실은 '사랑'만으로 버텨내기엔 너무 척박했다.
보수적이었던 황실과 달리 자유적이었던 그녀는 조피 대공비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귀족들도 방계 비텔스바흐 출신이자, 오스트리아 황실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였던 그녀를 뒤에서 비웃었으며,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쓸쓸한 생활을 보내던 시시는 거식증에 걸리게 되었다.
황실은 그녀를 어린 소녀로만 취급했다. 시시가 첫째딸을 낳았지만 조피 대공비는 손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따서 조피라고 이름을 붙였고, 시시가 너무 어리고 교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기르겠다고 하였으며, 시시는 조피 대공비의 허락 없이는 딸을 보러갈 수도 없었기에 둘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갔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바이에른의 여인은 합스부르크 황실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견딜 수 없었다.
헝가리: 또 다른 나의 집
그때 시시는 헝가리를 발견했다. 시시는 자신을 환영해주었던 헝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조피 대공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보헤미아어를 배우도록 했지만, 시시는 오히려 헝가리어를 배웠고, 자신의 모든 시녀들을 헝가리인으로 교체하였으며, 의상도 헝가리풍 의상을 입었다.
정치는 희미했지만 영향력은 컸다. 시시는 황제와 언드라시 줄러 백작을 설득하여 대타협(우스글라이히)을 이루어내, 헝가리 왕국이 국방, 재무, 외교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자치를 누리기로 합의하였고, 1876년 6월 8일 헝가리 사도왕, 사도 왕비로의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시시는 헝가리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되찾았다. 그곳에선 황후가 아닌, 자유로운 한 여인이 될 수 있었다.
제국의 비극: 사랑할 수 없는 황제
그러나 부부의 간극은 점점 벌어졌다. 황가에 늘상 분란이 일어났고, 그러는 사이에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바람을 피웠는데, 황제는 카타리나 슈라트라는 당대의 일류 여배우를 만났고, 그녀를 위해 별장을 지어주고 애지중지했으며 둘의 밀회는 34년이나 지속되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안 시시는 포센호펜 성으로 돌아가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강요와 황제의 부탁에 그녀는 빈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황제에게 부탁하여 마데이라, 몰타, 트리에스테 등을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황실을 떠도는 황후. 황제도 제국도 자신을 가둬두지 못했다.
비극의 종장: 사랑이 남긴 것
프란츠 요제프는 평생 제국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도 비극으로 얼룩져 있었다. 후계자로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지명했으나, 조카마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고 이는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방아쇠를 당겼고, 전쟁에서 진 제국은 공중분해 된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녀를 잊지 않았다. 황제는 가족들에게 '그녀가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내가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라며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고 하며, 뮤지컬 '엘리자벳'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황실 부부가 알려주는 진실: 권력과 사랑은 양립할 수 없다. 제국의 황제도, 백만 명의 신민을 가진 황후도, 결국엔 가슴 한구석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존재였다.
빈 중앙묘지에서 만나는 오스트리아 음악의 영혼: 거장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음악 순례길에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면, 호프부르크 궁전에선 프란츠 요제프와 시시의 유령이 여전히 궁전의 복도를 배회하는 듯하다.
오스트리아 여행자를 위한 노트
프란츠 요제프와 시시의 흔적을 찾으려면:
- 호프부르크 궁전(Hofburg Palace): 두 부부가 살던 황실의 모습을 간직한 곳
- 쇤브룬 궁전: 여름 궁전으로 시시가 자주 머물던 장소
- 아기궁전(Sissi Museum): 황후의 일생을 다룬 박물관
- 마데이라, 코르푸섬: 황후가 도망친 피난처들
오스트리아 역사는 단순한 황실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무게 아래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려던 두 인간의 투쟁이었다.
loading...
통찰 훈련소
0/7 완료기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