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새긴 아픈 역사, 제주 4·3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지난 79년, 한반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제주 4·3을 돌아본다. 경찰의 발포에서 시작된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손끝으로 새긴 아픈 역사, 제주 4·3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오늘은 4월 3일입니다. 2025년 4월 11일 유네스코에서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를 최종 등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날, 우리는 다시금 제주 4·3 사건을 마주합니다. 필자는 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4·3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아이의 넘어짐에서 비롯된 비극
모든 것은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3·1절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의 가두시위 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고,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1절 발포사건"입니다.
이어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정당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경찰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 지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빨갱이 사냥'을 한다며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습니다.
냉전의 소용돌이 속 제주도
필자는 여기서 멈추고 생각해봅니다. 제주도의 평화로운 주민들은 왜 갑자기 '빨갱이'가 되어야 했을까요? 해방 직후 제주는 6만여 명의 귀환 인구로 인한 실업난, 생필품 부족, 극심한 흉년과 콜레라 유행으로 민심이 극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했고, 그 절망이 저항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3월 10일의 총파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도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경찰의 방조 아래 우익청년단체원들이 저지른 방화를 무장대가 자행한 것처럼 경찰이 조작하고, 평화의 길을 닫아버렸습니다.
총성의 봄, 그리고 학살의 겨울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고,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평화협상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이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화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4·28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습니다.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던 그 순간이 미군정의 강경 진압 방침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1948년 11월부터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국가폭력이 남긴 것들
숫자로 보면 더욱 비극적입니다. 2024년 현재 확정된 희생자 수는 14,822명이지만, 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역사학자들은 특히 정부 측의 진압 방식이 잔인하고 조직적이었다고 평가했으며,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와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길 위에서
필자가 느끼는 것은 강한 분노와 함께 깊은 책임감입니다. 제주 4·3은 반세기 이상 금기의 역사였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20여 년간은 군사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 되었으며,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발설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2003년 10월, 고건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고문, 재판 없는 즉결처분, 연좌제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사건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손끝으로 새기는 기억
뉴스의 제목 "손끝으로 새긴 아픈 역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필자는 이것이 우리 손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이 역사를 깊이 새기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2025년 4월 11일 유네스코가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를 최종 등재함으로써 세계가 이 역사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인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주도는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마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필자는 생각합니다. 제주 4·3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국가폭력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또한 진실 규명이 얼마나 오래 걸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얼마나 외로움을 겪는지를 알려줍니다.
79년 후인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주 4·3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개인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짓밟혔는지를 인식하고, 우리 사회가 그러한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현재진행형인 과거사 정리에서 진실 규명과 책임 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손끝으로 새긴 이 역사가 우리의 가슴 깊이 새겨지고, 그것이 다시는 이런 비극을 막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loading...
loading...